행방불명: 김효재의 Z to A


현시원








회전하는 동영상 감옥=

김효재의 《디폴트(Default)》는 2019년 인간 분류법을 보여준다. 오늘날 인간이 인간을 만지는 법을 보여준달까? 인간을 보는 것까지는 모니터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액정이 알아서 하는데 거리 설정과 각자에게 다가가는 다리의 보폭을 몇 센티미터로 해야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기에, 인간은 서로 만지는 법을 까먹었다. 모두 다 유튜브 때문인가? 분명한 것은 유튜브와 스마트폰이 영혼을 먹어버리기 이전에도 사주팔자는 존재했지만, 인간의 존재 방식에 관한 감각의 방식 자체가 변화했다는 점이다. 즉 비가시적인 영역을 향한 믿음이 지금처럼 무기력하지는 않았다는 가설이다. 김효재의 영상 속 고체화한 이미지들은 리드미컬하게 춤춘다. 극대화된 운동성과 활성화 상태에서 김효재의 작업이 보여주는 사운드는 멈추지 않고 바닥을 탁탁 굳지 않게 만드는 환각제 역할을 한다. 작가가 제작한 세 편의 영상 〈SSUL〉, 〈Z〉, 〈UNBOXING〉은 서로가 서로의 ‘반역적인 대체물’이다. 완벽히 서로를 대체하지는 않으나 서로가 서로의 깨진 거울이 되면서 역상이거나 뒷모습이라는 오래된 은유를 깨고, 삼각형 구도를 그린다. 반역이라는 것(betray), 서로가 서로를 너무 쉽게 엿 먹일 수 있고 댓글 달 수 있고 로그아웃해 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상투적 일상이 된 것이다. 삼각형 구도 안에서 가로 세로의 좌푯값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사물화된 인간 존재는 360도 회전하는 시야를 향해 질주한다. 김효재의 작업에서 계속되는 것은 스트림 종료와 버튼의 프레임, 그리고 ‘광고 안내’ 문구다. ‘광고 후에 이 영상이 시작’될 거라고 말하지만, 이 시간의 멈춤은 지속될 진짜 시간과 별 차이가 없다. 즉 광고가 실재를, 리얼리티가 리얼리티 아닌 것을 대체하며 판단 기준은 세대, 시대, 인간의 육체 소유 여부를 막론하고 흐느적거린다.

기준이 어디 있어? 이 기본 설정 숏은 지속되고, 영상에서 우리는 기계 춤을 추는 베이비 Z를 보고(〈Z〉), 인플루언서 김나라(@naras._)의 굴절된 내레이션을 들으며 본다(〈SSUL〉). 배경과 형상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라는 점이 중요하다. 김효재가 불러낸 인간들은 각자가 각자를 오가며, 주격과 소유격과 목적격이 되기를 오가며 변신을 거듭하다. 변신이 한 번뿐이라면 그 변신은 의미가 있겠으나 변신이 반복되는, 김효재가 좌시한 대로 상투화가 될 때 난무하는 껍데기는 바지사장 같은 주체만 양산할 뿐이다.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계속 말하고 움직이나 별반 무엇이 어떻게 되든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회오리처럼 회전하는 나선형의 시공간성으로, 나는 이 영상을 가정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여러 번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내가 눈앞에서 목격했던 작가 김효재에 대하여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가 쓴 글 「왜 자라에서는 마스크를 팔지 않는가」의 제목을 빌려와, 여기에서부터 재시작하는 108번쯤의 번뇌와 저항이 섞인 선언문을 다시 김효재가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것은 오늘날 써볼 만한 매니페스토가 정치적 의제도 사회적 문제 제기도 아닌 ‘가시성(visivility)’에 관한 것이라는 나의 감상에 불씨를 던진다. 모든 것이 다 보이기에 비가시적 상태에 내면이든 마음이든 의미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군더더기다. 각자의 ‘생각’은 온라인 플랫폼 안에서 없어진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신문 독자 코너에서부터 시작한 개인의 발화는 이제 여기저기 모든 세상의 공란을 광고로 빈틈없이 쌓아 두었다. 군더더기가 되어버린 생각이랄까, 뭐 사유랄까 그런 걸 도려내니 남은 것은 셀피와 온라인상의 가이드(guide)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튜토리얼뿐이다. 이 셀피에 어떤 제스처와 목소리를 심어줄 것인가의 문제에서 필요한 것은 특정한 ‘설정값’이다.




생각해볼 문제

1. 김효재의 영상에는 미래의 인물 Z, 우가차카 베이비가 등장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태아는 평균 몇 센티미터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태아는 자란다. 매 순간 사람의 사이즈, 센티미터가 변한다. 평균은 있다. 45센티미터라고 한다. 『어머니의 탄생』이라는 두꺼운 노란색 책에서 다루는 것은 모성의 과학적 탄생 과정이다. 원숭이류 영장물의 이미지가 담긴 도판 하나에 주목해보면 엄마, 정확히는 엄마의 가슴을 잃은 아기 동물이 어떻게 자라나기를 포기했는지 보여준다. 흑백 사진이 보여주는 동물은 스스로 포기한 선택이 자발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효재의 《디폴트》에 등장하는 아기의 이미지는 늙지도 젊지도 않다. 이 디지털화해 조각난, 부자연스러운 동작에서 신생아는 베이비가 아니라 유전자 조합체다. 전형적인 귀여움으로 물건을 파는 베이비 형상이 아니라 여러 칩으로 대체할 수 있는 특정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한편 박근혜는 대통령 시절, 청년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말했다. K-MOVE(케이-무브). ‘K-MOVE 프로젝트’를 창시한 박근혜는 대략 ‘한국에 젊은이들이 텅텅 빌 정도로 밖으로 나가 취업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1 디지털이 기본 설정값으로 분산된 세계에서 20세기 초중반에 태어난 세대들은 오히려 신생아다.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은 과거에 대하여 신생아다. 서로가 가진 넘쳐나는 정보값의 비물질화 속에서 물질들은 서로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안에 비축되었다가 금방 나가버린 디지털 찌꺼기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김효재가 《디폴트》에서 다음에 올 존재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도 타인에 관해 생각할 여유를 쉽게 갖지 않기 때문에, 미지의 대화 상대에 김효재가 던지는 가설과 가끔의 조언은 표면상 하드한 블랙 유머지만 1990년대 이후 태어난 미술가가 온라인 창을 향해 던지는 페미니즘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온라인을 어떻게 해야 망가뜨리거나 새로 세울 수 있을까? 분노한 자들이 던졌던 노란 달걀이나, 정치 영화를 볼 때 함께하기도 했던 슬로건 또는 군무(群舞)를 대체할 새로운 물질은 어디에 있을까. 싸워야 할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세상을 배워야 하는 첫걸음마의 방법론 자체가 재설계되기를 기다린다.

2: “남은 것은 □□□밖에”라는 문장을 시대마다 쓰고자 할 때 빈칸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까? 발터 벤야민은 글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경험의 가치 하락에 관해 썼다. 남은 것은 몸뚱아리밖에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매일 아침 종이 신문이 곳곳에서 벌어진 세계의 정보에 착란을 일으킬 당시는 경험의 가치가 하락했다고 쓴 것이다. 벤야민은 그러니까 글을 쓴 1930년대 중반,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남은 것은 몸뚱아리밖에 없었다’고 쓰며 자신이 글을 쓰는 시점에 넘쳐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보의 양을 말한다. “누군가 여행길에 오르면 그는 무언가 얘기할 거리가 있다.” “독자들의 관심을 흥미진진하게 돋우는 것은 무미건조한 재료이다.”




김효재의 이미지론

무미건조한 재료, 그리고 여행길에 오르면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 오늘날 온라인 여행길의 투어를 매분 매초 자행하는 주체들에게 무미건조한 재료란,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타인에 어설프게 빙의하는 것이다. 김효재는 인플루언서라는 새로운 인간 종류인 ‘김나라’와 그 김나라의 부산물인 이미지가 일본 하라주쿠를 거쳐 되돌아온 이야기를 화면 정면을 보고 말한다. 이야기는 그저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실시간 재생 중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하는 세대에게 ‘육체를 어떻게 건사할 것인가’의 문제는 새로운 이미지 해독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르쳐줄 자가 없다. 단연코 배우는 것은 좋은 것이다. 배우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도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장-자크 루소는 말했다. 김효재가 끌어냈듯이 여전히 배워야 하는 세상이 있는 한 말하기의 도구는 반문의 형태여야 한다. 김효재는 세상의 수사학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작가는 세상을 구성해내는 전체적인 지휘자의 감각 아래, 파편보다는 전체, 자기 내면보다는 마음들의 네트워크에 더 관심이 있다.

여기 〈난 마돌은 과연 물리적 형태가 있는 것일까?〉(2017)라는 작가의 작업이 있고, 「왜 자라는 마스크를 팔지 않는가」라는 그가 쓴 길지 않은 글이 있다. 전자의 작업에서 김효재가 보여주는 영상은 작가를 영상과 온라인의 집적물 자체를 매체로 다루는 야심 찬 제너레이션, 또는 현실의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무분별한 국경 없음 상태에서 100%는 존재하지 않을 경계성 장애를 앓는 많은 존재에게 의심의 냉혈한적 시선을 던지는 자로 추리했다. 한편 「왜 자라는 마스크를 팔지 않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서울의 미감-없음을 다룬다. 내가 보기에 이 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타이틀이고 어쩌면 타이틀이 결론인데, 미세먼지와 혐오라는 2010년대의 가장 큰 이슈가 퍼덕이는 시대에 마스크라는 사각보의 이중성 때문이다. 미세먼지의 필수품인 동시에 또 그렇지만은 않은 토사물적 사물. 입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형태, 나의 물질적 자산 자체를 가리는 사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카무플라주다. 결국 김효재는 비가시적인 세계가 가시적 틀로 인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는 세계에서, 위급한 존재의 방법론 설정에 파고든다. 왜? 과연?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김효재의 질문은 전체 판을 보고 흔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특정 프레임에 갇혀 잘나가는 플레이어가 되기만을 바라는 재미없는 똑똑함 대신 약간의 멍청함을 장착한 아기들을 바라본다. 그런 점에서 김효재는 한결 과감하며, 온라인의 중심부에서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오기를 주춤하지 않는다. 김효재의 해독-리딩체로서의 작업은 동시대의 타인을 지각하며 함께 살 판을 짜는 폭넓은 구제의 몸짓이자 시도다.




플레이어를 싫어하지 , 게임을 싫어해라UNBOXING

마지막으로 내가 무엇을 싫어했던가 써보자. 나는 ‘소녀상’이 싫다.2 거대한 덩어리물인 남신 조각상들과 달리, 다리 모으고 앉은 소녀의 좌상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만 이 아이에 접근해본다. 소녀상에 담긴 정치적 의미에 잠깐 눈감고 그 생김새를 보자. 거대한 조각상 하나면 해결될 문제를 손에 쏙 들어오는 큐티(cuty)한 조각상 여럿으로 만들어, 머리카락 하나로 자기 여럿을 만들어내는 손오공만도 못한 존재로 자가번식하는 형태는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싫다’는 말이 싫은 이들이여, 이것은 반어법이다. 소녀상에 두른 목도리를 볼 때마다, 꽃바구니가 놓이기도 했던 때마다, 손으로 만든 사물을 물질에 덧입히는 가변성은 ‘노고가 들기에’ 인터넷 축적물의 가변성보다 더 ‘뭔가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어떤 손들이 떴던 그 민속적 문양의 흔적에 파노라마가 스치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 ‘로우 이미지(low image)’인 척하며 ‘쎈’ 상징을 가진 존재를 물신화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소녀상이 왜 물리적 형태를 가진 채 계속 번식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간다. 마음이 중요한 이들이여, 이미지가 마음속에 있는 것과 주머니에 부적을 넣고 나간 것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한다. 소녀상은 물리적 부적인 것이다. 나부터 지금 이걸 생각해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소녀상’이 아닌 거대한 조각상이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다는 걸 우리는 대부분 안다. 1968년 4월 27일 제작된 이순신 장군과 그 뒤로 눈치 없이 앉아 있는 세종대왕 동상처럼 차라리 고개를 천정으로 젖혀야 풀 숏을 볼 수 있는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어달라. 남성 동상의 우국적 형상 또한 ‘우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한 명은 싸우고 한 명은 적는데, 한 명은 전장에서 전사했고 한 명은 비만으로 죽었다는데 모두 다 위인이며, 어린이들은 이 위인을 통해 한국과 세계를 배운다. 나는 김효재가 새로 배울 것의 존재 양태를 고민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나눈 대화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가 쓴 새로운 텍스트를 읽을, 아직 태어나지 않을 조합체-인간들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이들은, 몇 년도부터 그들이 인간으로 인정할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생각할까.





1. 뉴비씨, 「朴정부 K-MOVE, 해외취업 청년 중 173명 ‘행방불명’」, 2017년 10월 17일 자. (http://www.newbc.kr/news/articleView.html?idxno=743) 한편 박근혜의 정확한 말은 “대한민국 청년이 (다 중동에 가서)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세요”였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50408004454)
2. 2016년 11월 이동하는 이미지와 ‘저화질 이미지’라는 인용을 통해 이 소녀상이 왜 여러 개가 있어야만 힘을 발휘하는 소도구로 존재해야만 하는가 쓰기도 했다.